박익수 교수

은밀하게 자라는 씨 비유(4:26-29)

본문읽기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려 놓고, 27 밤에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본문해석

질문1)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다'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예수께서 왜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나라는 지상의 모든 나라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의 실체를 인간의 사고나 언어로는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것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시지 않고,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분명한 것이지만 그렇게 밖에는 표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초현실적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던 인식하지 못하던 우리가 사는 매일매일의 일상 생활 속에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질문2) 27절에서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그 사람"은 씨가 "어떻게 자라 열매를 맺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담겨진 예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을 '농부'라 하지 않으시고 중성인 "그 사람"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는 단지 땅에 씨를 뿌리는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그 씨는 자라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씨가 나서 자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과는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은밀하신 역사 하심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온전히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의사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질문3) 28절에서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과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28절)

예수께서는 땅이 열매 맺는 과정을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처음에 아주 작고 미미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인간들이 느낄 수 없을 만큼 서서히 성장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나라는 점점 확장되어져 가고, 결국에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질문4) 예수께서는 "종말, 곧 심판의 시기"를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29절)

29절은 요엘서 3:1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요엘서에서는 "추수"(秋收)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초점이 [심판]보다는 심판의 [때], 즉 어떤 결정적인 시점(時點)에 오게 되는 종말에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오며, 끝은 이미 시작 속에 하나의 약속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질문5) 당신은 이 "은밀하게 자라는 씨의 비유"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반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어떤 노력, 율법을 위한 노력이나 정치적/혁명적인 노력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역사 하심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오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4:30-32)

본문읽기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대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시보다도 더 작다. 32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본문해석

질문6)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에 비유되고 있습니까?(31절)

씨앗의 비유와 비슷하게 겨자씨 비유는 이미 지금 하나님 나라가 도래해 있음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거창하고 위대한 모습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없을 만큼, 보이지 않을 만큼, 마치 아직 오지 않은 것처럼 시작되었지만, 그 나라가 완전하게 이루어 질 때에는 누구나 경외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나라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심기 전의 겨자씨의 상태와 심은 후의 겨자씨의 변화 상태를 대조시킴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씨앗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겨자씨 비유는 이미 지금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려는 것이고, 비록 그 시작은 아주 미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시작은 결과적으로 이미 놀라운 완성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7) 마가복음 저자는 "겨자씨"의 비유로 무엇을 말하려 한 것 같습니까?

겨자씨 비유는 원래 예수와 함께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그 시작은 사람들이 볼 수 없을 만큼 미미하지만, 그 나중은 공중의 새들이 깃들만큼 된다는 왕국의 시작과 완성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유의 신학(4:33-34)

본문읽기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본문해석

질문8) 예수께서 말씀을 하실 때 많은 비유를 사용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한 목적은 원래 인간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분의 말씀, 그 분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 나라는 너무도 높은 진리의 세계에 속하여 인간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언제나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일상생활의 경험이나 언어로 표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인간의 이해를 위한 가르침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질문9) 저자는 예수께서 비유의 말씀을 누구에게만 해석해 주셨다고 주장합니까?

'외인'인 대적자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제자들에게는 "해석으로" 나타났습니다. 전자에게는 은폐이며, 또 후자에게는 공개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대적자들이 받지 못하는 계시를 받으며, 대적자들이 갖지 못하는 특권과 약속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그리스도인들과 대적자들 사이의 차별성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자신의 공동체 안에 들어 온 제자들은 계시의 특권을 누리지만, 적대자들을 포함한 외인들은 무지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심(4:35-41)

본문읽기

35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36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두고,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37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찼다.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39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라, 잠잠하여라."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본문해석

사건의 무대는 바다, 좀더 좁게 말하면 예수께서 타신 배입니다. 시간은 어두워지는 저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들을 가르치신 후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질문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는 예수의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전폭적인 순복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에게 절대 신뢰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질문11) 예수와 제자들이 탄 배는 밤에 바다 위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을 때에 제자들의 행동과 예수의 행동을 비교해 봅시다.

당황해 하는 제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허둥대는 제자들과 대조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와 그의 주권과 안정성을 나타내려는 의도입니다. 또한 제자들의 위기관리 능력, 곧 믿음을 시험하시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처럼 자야 할 때에 자지 아니하고, 자지 말아야 할 때는 잤던 것입니다(14:37).

질문12) 제자들의 탄원 내용과 예수의 반응을 말씀해 보십시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죽게 된 위기의 상황인데도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책성 하소연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께서 누구이시며, 그가 어떠한 권세를 가지셨는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간청에 즉시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실 때에 바람이 그치고 바닷가 잔잔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연재해를 포함한 모든 곤궁에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질문13)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에게 "고요하고 , 잠잠하여라" 말씀하신 후 제자들을 보고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제자들의 믿음이 아예 "없는"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귀신들을 내쫓으시고, 병을 고치시는 이적들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적"은 예수의 인격의 비밀을 가르쳐 주는 하나의 표식인데도 그런 이적을 보고도 예수 안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구원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곧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주변의 조그마한 상황변화에도 몹시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1:36절 이하와 4:13절에서 나타나는 제자들의 무지(無知)와 오해가 여기서는 "믿음이 없음, 즉 불신앙"으로 선고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잘못하면 예수의 가족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외인"(外人),즉 예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될 위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질문14)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심을 보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는 문자적으로 "저희가 큰 두려움을 두려워하여"입니다. 여기서의 "두려움"은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두려움 자체입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의 능력 속에서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을 볼 수 있었고(참조.1:22절),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 앞에 그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느낀 신적인 두려움은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약간이나마 알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하는 질문은 단순히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예수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제자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크시고 위대한 분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당신은 예수와 제자들이 탄 배가 바다에서 큰 광풍에 휩싸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가정, 교회, 혹은 사회문제와 어떻게 연관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마가복음의 저자는 캄캄하고 망망한 대해를 항해하는 일엽편주와 같이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파 속에서의 교회의 존폐에 대한 많은 문제들에 대한 마가복음 저자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 당신은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의 믿음이 문제인 것을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을 써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