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익수 교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의 능력(6:34-44)

본문읽기

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5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36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37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들이 알아 보고 말하였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39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40 그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 41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리고 그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

본문해석

우리는 이제껏 이 단락을 읽고, 또한 이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른 5000명"을 먹이고도 "12바구니"가 남았다는 식으로 숫자적인 개념에 치우쳐서 단순히 작은 것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먹였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이적을 통하여 가난과 굶주림의 물질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게 하셨으며, 또한 그곳에 모인 많은 무리들과 함께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한 사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당신은 누구십니까?"의 응답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목자"요 "구원자"로 나타내심과 동시에 무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도래했음을 경험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적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뒷받침해 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급식이적 기사는 마 14:15-21 ; 눅 9:1-17 ;요 6:1-15에도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막 8:1-10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6:34-44과 8:1-10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6: 34-44과 8:1-10에 있는 두 개의 급식 이적기사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두 개의 보도임이 확실합니다. 이 두 단락에서 공통적인 내용 요소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모인 무리를 불쌍히 여기심, 한적한 곳, 제자들이 당혹스러워 함, 예수와 제자들간의 대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제한된 먹거리를 확인함, 예수께서 군중을 떼지어 앉게 하라고 명령하심, 예수의 기도, 제자들이 음식을 나누어 줌, 식사를 한 후 남은 부스러기를 모음, 그리고 참석한 사람의 수에 대한 언급.
물론 빵, 물고기, 광주리, 그리고 참석한 군중의 숫자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단지 지엽적인 문제일 뿐, 이 기사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똑 같습니다.

질문1) 예수께서는 모인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여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분이 되어 주고자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는 32절에서 타신 배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이제 좀 쉬고 피로도 풀기 위해서 그곳에 오셨는데 정작 기다리고 있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목자 없는 양 같은 불쌍한 큰 무리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셨을 때, 귀찮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픔을 함께 하며 도와주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자비"가 하나님의 속성으로 나타난 것과 직결되는데, 예수께서는 큰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을 받아야 할 인간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특별히 신약에서 "불쌍히 여기다"는 언제나 예수께서 인간들에 대해서 갖고 있는 마음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마 18:27 ; 눅 10:33 ; 15:20). 이러한 관계가 본문에서는 "목자-양"이라는 상징으로 예수는 "목자"로, 모인 큰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으로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질문2) 예수께서는 모인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히 여기시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먼저 하셨습니까?(34절)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연민을 느끼신 후 어떠한 기적 보다는 먼저 가르침으로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은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며, 목자가 없음은 곧 말씀의 부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는 모인 무리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양식이 없다거나, 또는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음으로 이해하신 것입니다(암 8:11). 오늘의 우리 상황도 그 당시의 사람들과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도 이스라엘에는 많은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목자, 즉 지도자가 없다고 하신 것은 당시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랍비, 그리고 공직자들은 모두 자기 이익 추구에 혈안이 되어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 율법주의에 빠진 나머지 이미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신앙은 뒷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목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을 망각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거나, 믿음을 심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그들을 가르치시며 위로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계의 많은 지도자들에게서 예수 당시의 교계 지도자들과 똑 같은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을 우리 모두는 참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질문3) 예수께서 무리를 가르치실 때에 어느덧 때가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의 식사문제를 염려한 제자들의 제안과 예수의 말씀을 찾아 써 보십시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는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린 나머지 하루 종일 예수의 가르침에만 전연 몰두했는가를 잘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예수께 군중을 해산시켜 촌과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현실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강조하시기를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으로 "무리들 스스로 가서 사먹게 하지 말고 너희가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우리의 책임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질문4)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에도 여전히 이성적인 판단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무리들의 단 한끼의 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당장 얼마의 경비가 필요하다고 계산했습니까?(37 하반절)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아직도 예수가 누구이신 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몰이해를 나타내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인간의 제한된 가능성의 세계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는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200 데나리온"은 장정 한 사람의 200일 동안의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인데, 이것은 아마도 제자들이 군중의 수를 낮게 어림잡아 계산한 액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문제는 제자들이 무리들의 식사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그만한 돈을 갖고 있었느냐가 아니라, 제자들이 아직도 합리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더욱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권능으로 이 모든 위기를 극복하시리라는 신뢰감, 즉 믿음을 아직도 갖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마가복음서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수나 돈의 액수를 가리키는 "숫자"에 있지 않고, 제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예수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와 권능을 믿는 믿음 없음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지극히 인간적이고 합리적으로 우리 편의 불가능만 보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은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질문5) 제자들은 무리 가운데 먹거리라곤 얼마나 있다고 예수께 보고하였습니까?(38절)

예수께서 사람들이 양식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자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보고했는데, 이 정도의 먹거리는 턱 없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빵"은 밀이나 보리로 만든 둥근 모양의 빵을 말하며, 유대인들이 먹는 것으로 우리의 밥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물고기"는 소금에 저리거나 불에 구운 것으로, 빵과 함께 먹는 가장 기본적인 반찬이었습니다.

질문6)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39-40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들을 떼를 지어 앉게 해서 식사를 준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당시 식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떼를 지어 자리에 앉고, 기도는 서서 드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전히 몰이해와 불신앙의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급식이적에 참여케 하셨음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에 참여함은 꼭 자격을 갖추었다기 보다는 참여하다 보면 좋은 믿음을 갖게 될 소망을 갖는 셈이지요.
무리들이 푸른 잔디 위에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 없이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은 모습은 출 18:21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천 명, 백 명, 오십 명, 그리고 열명씩 군거하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처럼 모인 군중들이 푸른 잔디 위에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앉은 것은 마지막 때 하나님 백성도 모두 함께 잔치에 참여하여 메시야와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을 연상시킵니다.

질문7)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다 배불리 먹게 하시고도 얼마나 남겼습니까?

유대인들은 집을 떠날 때, 고리버들로 만든 광주리 속에 점심과 필수품을 담아 들고 다님으로써 이방인의 음식을 먹지 않으려 했고 공동식사 후에는 남은 부스러기를 모았습니다. 특히 43-44절에는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장정만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았다는 표현은 급식이적에 나타난 예수의 능력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4: 21에 의하면, 5000명이라는 수는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지 않은 남자 장정만의 수효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은 사람들의 수효에 대한 이런 다른 보도를 접할 때 어느 본문이 더 역사적으로 정확하느냐를 물어서는 않되고 오히려 나중의 마태복음의 본문은 급식이적에 나타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더 강조하려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7병2어로 4천명을 먹이심(8:1-10)

본문읽기

1 그 무렵에 다시 큰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2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서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3 내가 그들을 굶은 채로 집으로 돌려 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 이 빈 들에서,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이 모든 사람이 먹을 빵을 장만할 수 있겠습니까?"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6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명하여 땅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들어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그들에게는 작은 물고기가 몇마리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것을 축복하신 뒤에, 그것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8 그리하여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으며,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 9 사람은 사천 명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헤쳐 보내셨다. 10 그리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

본문해석

질문8)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사흘이나 자신과 함께 있었던 "무리들"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2절)

여기서 "사흘"은 문자 그대로 삼일 동안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굶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무리들은 광야에서 그만큼 예수의 말씀과 기적에 심취했기 때문에 배고픈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6:34에서는 예수께서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심히 불쌍히 여기셨으나, 여기서는 무리에게 음식물이 없는 것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5병 2어의 이적은 무리에게 목자가 없음을 불쌍히 여긴 데서 기인했으나, 이 이적은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에게 먹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굶주린 군중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질문9) "내가 그들을 굶은 채로 집으로 돌려 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이 말씀은 무리에 대한 예수의 자비와 동정심의 토로이지, 어떻게 할까 염려하며 주저하시는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생의 진리를 전하는 엄청난 과제를 수행하시면서도 무리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양식문제 같은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필요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도움을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질문10) 그러나 무리를 향한 예수의 깊은 연민의 정과 제자들의 반문은 좋은 대조가 됩니다. 그들의 관심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반문은 "5병2어 이적" 때의 질문과 어떤 차이점을 보입니까?(4절)

5병2어 이적 때에 제자들은 금전적인 문제를 염려하여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라고 질문했으나, 여기서는 광야라는 장소 문제를 염려하여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또 다른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질문은 아주 이성적인 것이었지만, 불가능한 것만 생각하고 아직도 예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아주 어리석은 불신앙과 무리를 또 한번 노출시킨 것입니다.

질문11) 예수께서 떡 7덩어리와 물고기 2마리를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셨을 때, 사흘간이나 허기진 무리들 몇 명이 배불리 먹고 얼마나 남겼습니까?(8-9절)

어떤 사람들은 "사천"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으로 이해하여 땅의 사방에서 오는 이방인들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나오는 떡 7개, 물고기 2마리, 인원수 4천명 등을 자꾸만 은유적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결국은 예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 이 이야기의 이적성을 부인하고 마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행하신 기적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에 근거한 것이므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5:38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4000"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놀라운 것인가를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부족을 채우고도 오히려 넘쳐 풍요해 질만큼 무한하다는 말씀입니다.

♣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도움을 요청 받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__. 자신의 형편으로는 불가능함을 내세운다.
__. 도움을 줄만한 다른 사람을 함께 찾아본다.
__. 여유가 생길 때, 다음에 꼭 돕겠다고 말한다.
__.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서 돕는다.

♣ 당신은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의 일에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

__. 예 __. 아니요

♣ 당신 자신에게는 불가능해 보여도 주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