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익수 교수

바리새인의 요구를 거절하심(8:11-13)

① 본문 읽기

11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와서는, 예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그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요구하였다. 12 예수께서는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② 본문 해석

질문1)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힐난하고 시험하기 위해서 무엇을 구했습니까?

마가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예수의 적대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힐난하며"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변론(辯論)하며"라는 뜻입니다. 또한 "시험하여"도 언제나 적대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1:13 ; 8:11 ; 10:2 ; 12:15 ; 14:38). 바리새인들은 진리를 알기 위해 변론한 것이 아니고, 다만 예수를 넘어뜨리기 위해 변론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요구한 것은 "하늘로서부터 내리는 표징"이었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요구한 표징이란 많은 이적들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의 신분을 확실하게 증거해 줄 수 있어 자신들도 예수를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의 이적들을 "능력들"로 이해합니다(5:30 ; 6:2,5,14,39 ; 12:34). 그러나 이러한 이적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지, 이적들 자체가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은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하늘로부터 오는 공개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저자가 "표징"을 '능력'과 구분시키고 있고, 이 표징이라는 말이 마가복음에선 오직 이곳과 13:4,22절의 묵시적인 언급들에서만 나타나는 사실은, 바리새인들의 요구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달이 정지하며,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는 것, 즉 하늘의 변화와 같은 전우주적, 묵시적인 표적을 구했음을 보여 줍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표징을 요구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표징만을 요구하는 것은 곧 예수를 넘어뜨리려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불신앙은 하나님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체험을 중요시하는 교인들은 하나님을 확실히 믿기 위한다는 미명아래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조건들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인간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이지, 결코 표징은 아닙니다. 믿음을 먼저 갖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볼 때 모든 것은 단순한 능력 이상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질문2)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표징"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완고한 불신과 무지와 적대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의 많은 기적들을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로 시작되는 맹세 형식을 사용하여 '표징'을 거부하실 의사를 확고히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 단지 표적만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우둔하며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하나님께서 만일 표적을 주신다면 내가 저주를 받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는 엄숙한 맹세를 나타내는 히브리식 어구입니다. "이 세대"는 불신앙의 세대이므로, 바리새인들이 찾는 그런 식의 "표징"은 오직 종말 때에 인자가 도래할 때까지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표징을 구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불신앙의 상태로 남게 될 것이라는 저주입니다.

질문3) 바리새인들에게 책망하신 후 예수께서는 다시 배를 타시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아마도 "건너편"은 뱃새다로 추측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힐난과 시험적인 요구에 만족할 만한 응답을 주지 않은체 표표히 길을 떠나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일시적인 승리감에 도취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아래 놓이게 된 현실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에서 주님을 떠나 보낸 후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인데, 이는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주님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의 '표적'만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주님을 믿지 못하고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제자들의 무지를 책망하심(8:14-21)

① 본문 읽기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그들이 탄 배 안에는 빵이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16 제자들은 서로 수군거리기를 "우리에게 빵이 없어서 그러시는가 보다" 하였다. 17 예수께서 이것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 하여 너희는 빵이 없는 것을 두고 수군거리느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주었을 때에, 너희는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열두 광주리입니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남은 부스러기를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광주리입니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② 본문 해석

제자들이 떡 가져 오기를 잊었기 때문에 배에는 떡이 한 개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이 단락의 시작을 아주 단순하게 제자들이 떡 가져오는 것을 잊어서 예수 일행이 곤란한 처지에 빠졌을 때 있었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떡 가져오는 것을 잊은 것은 갑작스런 출발이나, 혹은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열띤 논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질문4) 예수께서는 이러한 곤란한 상황을 오히려 제자들을 가르치실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고, 제자들에게 무엇을 경계하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는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경고하심으로써 다음에 계속되는 대화의 실마리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헤롯이 함께 제자들에게 경고된 것은 양자 사이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과 "헤롯"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에 대한 적대적인 세력들로 묘사되고 있으며(3:6 ; 12:13), 그들 모두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하는 자들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여기의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은 마태 16:12이나, 누가 12:1절에서처럼 그들의 교훈이나 외식을 가리키지 않고, 예수를 죽이려는 악한 성향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예수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도 본의 아니게 바리새인들과 같은 입장에 있게 되며, 결국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는 것과 같은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로 이 점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질문5) 제자들은 예수의 경고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까?

14절을 16절과 연결시켜 보면, 제자들이 수군거린 것은 예수의 경계의 말씀이 그들에게 떡이 없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지 "떡"에 관련된 말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떡이 없음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급식 이적 사건에 참여한 후에도 여전히 떡에 대해 염려하는 불신앙과 배교의 위험에 빠져들지 말라고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15절의 말씀으로 한편으로는 예수의 경고와 제자들의 오해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과 같은 입장에 놓일 위기에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찌하여 너희는…못하느냐"고 힐책하신 것은 제자들의 무지와 우둔함 때문에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언잖으신가를 잘 대변해 줍니다.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두 번에 걸친 기적의 급식 사건 자체를 기억하고 있느냐, 있지 못하느냐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이적사건들 속에 담긴 의미, 즉 예수의 메시야 되심과 그의 구원의지를 알지 못하느냐는 힐문입니다.

질문6) 예수는 다시 제자들에게 무엇을 촉구하고 계십니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바로 알아보기를 촉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급식이적 사건에 직접 참여했던 제자들에게 아직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벳세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8:22-26)

① 본문 읽기

2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23 예수께서 그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물으셨다. "무엇이 보이느냐?" 24 그 사람이 쳐다보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니는 것 같습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 사람이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26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

② 본문 해석

마가복음 저자가 원래 함께 연결되어 있던 물위를 걸으심의 자료와 맹인 치유 자료사이에 제자들의 불신앙과 소경의 눈뜸을 대조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많은 자료들을 삽입시킨 것입니다.

질문7) 예수께서 벳세다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께 무엇을 간청했습니까?(22절)

우리는 당시 소경에 대한 무서운 편견에도 불구하고 소경을 예수께 데려온 마을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소경의 손을 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병을 고칠 때 이러한 동작을 취하는 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그의 치병기법(治病技法)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식으로 예수의 행동을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7:33의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와 8:27에 나오는 내용처럼 예수께서 제자들을 멀리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데리고 가서 가르치신 것과 같은 맥락에서 단순히 병을 비밀스럽게 고치려는 것이 아니고, "병자와의 오븟한 만남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으려는 것입니다.

질문8) "무엇이 보이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소경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24절)

소경은 아직 시력이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단 한번의 행위로 소경이 완전하게 고쳐지지 않은 이유는 예수께서 소경을 치유하시는 과정을 보다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한 문학적 고안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질문9) 예수께서 다시 소경의 눈에 안수하셨을 때 나타난 결과를 적어 봅시다(25절).

"그 사람이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이 회복하여 똑똑히 보게 되었다."는 24절의 "쳐다보고"와 대조됩니다. "쳐다 봄"이 '위로 봄'이라면, "뚫어지게 봄"은 '자세히 응시함'이요, 그리고 "똑똑히 봄"은 주의 깊게 '자세히 봄'을 뜻합니다. 이는 소경의 회복 단계를 나타냅니다. "똑똑히"는 여기서 '분명히'라는 뜻입니다. 이는 소경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뜻합니다.

질문10) 예수께서는 시력을 완전히 회복한 소경을 집으로 보내시면서 무엇을 당부하셨습니까?(26절)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는 예수의 명령은 '그렇다면 고침받은 소경은 어디로 가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맞부딪칩니다. 그래서 어떤 사본에서는 "마을 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또 어떤 사본에는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 그리고 마을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명령을 마가복음서에 반복해서 나타난 "메시야 비밀"에 대한 침묵 명령과 연관해서 이해하면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과 첫 번째 수난예고 (8:27-33)

① 본문 읽기

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28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0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② 본문 해석

마가복음서 저자는 언제나 새로운 단락의 첫머리에 제자들을 등장시킵니다(1:16-20 ; 3:13-19 ; 6:7-13). 이제 소경의 눈뜸과 제자들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특히 제자 가운데서도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한 후에, 제자들은 모두 이 메시야가 반드시 받게 될 고난에 동참하도록 요청을 받습니다.
이 단락의 본문은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질문과 베드로의 고백(27-30절), 수난예고(31절), 그리고 베드로에 대한 질책(32-33절)입니다. 특히, 27-30절은 6:14-15과 평행되는 구절입니다.

질문1) 사람들은 각각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였습니까?

제자들의 대답에 의하면,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 또는 "예언자 가운데 한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세례 요한이라는 생각은 헤롯 안티파스의 생각이었습니다(6:14). 왜냐하면 예수님의 설교가 세례 요한의 설교와 내용이 같았기 때문에(마 3:2 ; 4:17)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엘리야라고 생각한 것은 엘리야가 불의 사자로(왕하 1:1-10)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는데, 예수님께도 같은 면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눅 9:53). 예수님을 "예언자 가운데 한분"으로 본 것은 신명기 18:52의 예언, 즉 종말에 하나님의 한 선지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에 근거한 것입니다.

질문2)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물어보신 의미는 무엇입니까?(29절)

앞의 질문은 그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한 예수의 모습과 정체성에 관한 단순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은 과연 스승인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결단과 결심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질문3) 제자 가운데 베드로는 예수를 누구라고 고백했습니까?(29절)

베드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를 말합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구원의 때를 선포할 것이라는 사상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시 18편 ; 78:65-72 ; 암 9:11-12 ; 사 9:11 ; 슥 4:6-10 ; 마 10:47 ; 11:10 ; 12:35). 베드로는 이런 메시야 대망의 성취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질문4)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30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메시야 되심에 대해서 침묵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침묵의 명령은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즉 십자가 사건과 연관됩니다. 또한 이 침묵명령은 이어지는 베드로의 잘못된 요구(32절)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 침묵의 명령과 경계하신 표면적인 이유는 베드로의 고백이 함축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야로의 기대를 일으키지 않으시려는 의도와, 아직은 메시야의 역할이 공개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질문5) 예수님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첫 번째 수난예고를 여러분 자신의 말로 정리하시고, 그 의미를 써보십시오(31절).

첫 번째 수난에 관한 예언은 제자들에 대한 교훈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고난 당하고 끝내 죽임을 당하는 운명이 예언됩니다. 예수께서 당하는 고난은 구약의 고난받은 종의 삶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시편 118:22에서는 의인을 죽이려고 궁리하는 자들을 적대자로 봅니다. 이 적대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예언자의 운명이었습니다(렘 2:30 ; 11:18-21 ; 20:2 ; 26:8-11 ; 왕상 18:4, 13)
31절에 따르면, 유대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서기관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죽이게 됩니다. 이들은 유대인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입니다. 이 공회는 구약의 장로제도를 따라 한 지파에 6인씩 보통 72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부활에 대한 언급은 인자(사람의 아들)가 지상의 활동 뿐만 아니라 재림 때에 심판자로서 다시 오게 된다는 기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수단으로서 해석되기보다는 기독론적으로, 다시 말해서 예수의 인격과 역할과 관련되어서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 수난 예고의 중요성은 예수께서 드러내놓고(32절) 말씀하신데서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질문6) 예수께서 베드로가 고난과 죽음을 피할 것을 간청할 때 꾸짖으시며 물러가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지금 나의 모습이 바로 베드로의 모습이 아닌지, 자신의 신앙상태를 점검해 보신 후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마음자세를 써보십시오(32-33절),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아서 고난받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엇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항의성 간청은 결국 예수님께는 유혹의 말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마치 시험을 이길 때와 같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이때 "내 뒤로 물러가라"는 의미는 내 눈에서 사라지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사탄은 어떤 악의 실체라기 보다는 진리를 왜곡하거나 거짓을 말하는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롬 16:17-20 ; 고후 11:13-15). 이처럼 사탄은 하나님의 뜻을 막아서는 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단호히 사람의 뜻을 따를 것을 간청하는 베드로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이런 예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수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명백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제자들과 마가의 신앙 공동체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십자가를 거부하거나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까지도 함께 따라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은혜를 사모한다 해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거부하거나 피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사람의 일에만 매달려서 자기 자신만을 위한 행복과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사실 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과 신앙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아직도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입니다.
마가복음서 저자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을 단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삶은 자기 목숨까지도 잃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마가복음서 저자는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나타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결론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마가복음을 읽는 우리들로 하여금 제자로서의 우리 생활을 되돌아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