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익수 교수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5:1-20)

본문읽기

1 그들은 바다 건너편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으로 갔다. 2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곧 악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를 만났다. 3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사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었다. 4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었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 5 그는 밤낮 무덤 사이나 산 속에서 살면서,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곤 하였다.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엎드려서 7 큰 소리로 외쳤다. "더 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고 애원합니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8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악한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군대입니다. 우리의 수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10 그리고는, 자기들을 그 지역에서 내쫓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11 마침 그 곳 산기슭에 놓아 기르는 큰 돼지 데가 있었다. 12 귀신들이 예수께 간청하였다. "우리를 돼지들에게로 보내셔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13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악한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거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 쪽으로 비탈을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14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달아나 읍내와 시골에 이 일을 알렸다. 사람들은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보러 왔다. 15 그들은 예수에게 와서, 귀신 들린 사람 곧 군대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16 처음부터 이 일을 본 사람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돼지 떼에게 일어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자기네 지역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께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19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여라." 20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다. 그리하니 사람들이 다 놀랐다.

본문해석

우리는 이 이적 기사를 다음과 같이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심과 귀신 들린 자와의 대면(1-2절) 귀신 들린 자의 이전 상태를 자세히 설명(3-5절) 귀신 들린 자 안에 내주(內住)하는 악령과 대면하시는 예수(6-10) 더러운 악령에 대한 예수의 승리(11-13절) 거라사 지방 사람들의 반응(14-17절) 귀신들렸던 사람에 대한 예수의 명령과 이 사건의 결과의 결과입니다(18-20절).
이 이적 이야기는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들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해서 그들 스스로 망하도록 하는 예수의 능력을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로써 예수께서 갈릴리를 중심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귀신의 더러움에서 해방시키러 온 분임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저자의 관심은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개하는데 있지 않고,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알리려는데 있습니다.

질문1) 3-5절은 귀신 들린 자가 과거에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적어 보십시오.

그 사람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고 또한 무덤에 거주해야 했기 때문에 이중으로 저주받은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고통받는 인간의 참상을 강조하는 것은 치유설화의 양식에 속합니다. 치유설화에서 흔히 병자의 상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뒤 따라 나올 치유자의 능력을 더욱 더 부각시키기 위한 문학적 고안입니다. 이러한 대조법은 특히 사람들이 그에게 여러 번 쇠사슬과 쇠고랑을 채우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아무도 그을 묶을 수 없었다는 언급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거라사 광인의 모습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불신자들과 우상숭배자들, 즉 이방인들에 대해서 말하는 이사야 65:1-7절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현대인들과도 유사합니다
질문2) 이 귀신 들린 자의 상태는 오늘날 누구의 모습과 유사합니까?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곤 하였다"라는 표현을 볼 때, 그는 옷도 입지 않았고(15절), 비정상적인 소리를 지르고 제 몸을 스스로 상하고 있었습니다. 더러운 곳에서 더러운 귀신이 들려 비인간적인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비참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몸에 해로운 짓거리를 서슴없이 부단이 행하면서 소리 소리 지르며 발을 동동 구르지 않습니까?

질문3) 귀신 들린 자가 멀리서 예수를 알아보고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귀신이 예수의 정체를 "더 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는 것은 예수의 능력을 꺾어보자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귀신은 언제나 자신을 내쫓는 사람의 힘을 꺾기 위해 그의 이름을 알아내거나 그의 신분과 정체를 먼저 밝혀 내는 것입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왜 당신은 나를 괴롭히려 합니까? 제발 괴롭히지 마옵소서" 라는 귀신의 불평과 애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고 애원합니다."는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두고 간청하오니" 입니다. 이 표현은 귀신을 내쫓는 사람이 귀신을 내쫓을 때 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귀신 자신이 이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귀신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 것은 파멸을 예견한 일종의 절망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질문4) 9-10절에 있는 예수와 귀신과의 대화를 정리해 보십시오.

귀신을 내쫓는 사람이 귀신과 대화를 나누면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귀신의 이름을 확인함으로써 귀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신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은 귀신을 제어하기 위한 첫 단계가 됩니다. 귀신은 예수의 질문에 즉시 답변함으로써 예수께 복종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예수를 당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하게 구합니다. 이러한 일은 귀신을 내어쫓을 때 흔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귀신들은 자기가 거하던 곳에서 쫓겨나게 될 경우 보통 자기들이 지금까지 있던 지방에 머물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이방 지역은 귀신들에게 친숙한 지역으로 이해되었는데, 귀신들도 그 지역에 계속 머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질문5) 귀신은 "자기들을 그 지역에서 내쫓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간청한 후에" 12절에서 예수께 어떠한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까?

'돼지'는 유대인 사회에서 부정한 동물로서 혐오의 대상이었고(레 11:7 ; 신 14:8), 주로 이방 지역에서 사육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거라사 지방에 돼지 떼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지역이 이방지역이며, 그것을 치는 자들도 이방인이며, 귀신 들린 자도 이방인이었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께 이 지방을 떠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부정한 동물인 돼지에게로 들여보내 주기를 간청한 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자명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더러운 영"인 귀신들은 이제 부정한 동물로 여겨진 "돼지"를 처소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의 능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으며, 부정한 동물인 돼지에게라도 들어가 살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질문6) 13-15절은 더러운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갔을 때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어난 사건과 사람들의 반응을 구체적으로 써 보십시오.

13절에 의하면, 돼지에게로 들어가고자 하는 더러운 귀신들의 간청을 예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저자는 예수께서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에는 전연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난 증거를 주위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고, 또한 귀신들린 사람에게도 이제는 그가 귀신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확신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이 이야기를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확신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돼지들이 "거의 이천 마리"나 되었다는 표현은 9절의 "군대"(레기온)와 연관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의 돼지 떼는 보통 100-150마리 정도였으며, 아주 많다고 해야 300마리 이상을 초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수를 훨씬 초과하는 [2000 마리]라는 수는 아마도 로마 군단의 수와 연관하여 사용한 것이며, 귀신들린 사람 안에 거하는 귀신들의 수가 그만큼 많았음을 알리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돼지 치던 자들은 귀신들이 귀신들렸던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에게로 들어갔으며, 그 결과 돼지들이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몰사(沒死)한 것을 보고 놀라서 읍내와 시골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때에 읍내와 촌의 사람들은 예수 있는 대로 와서 귀신들렸던 사람이 제정신이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귀신들렸던 자의 예전의 심각한 상태를 아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렸던 자"는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게 되어서 앉아 있었습니다. 전에는 그 누구도 그의 악마적인 힘과 불안정함 때문에 두려워서 다가갈 수조차 없었지만, 이제는 제 정신이 들어 온전한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목격한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은 비로소 예수의 신적인 능력에 대해서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질문7) 이 이적기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귀신들렸던 자"와 "돼지들"에 대한 이야기가 분리되어 나오고 있는 것은 귀신들, 곧 군대들에 대한 예수의 이중적(二重的)인 승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가 아니라,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귀신들렸던 자가 온전하게 되고, 귀신들이 들어간 돼지가 바다에 몰사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질문8) 당신은 이적과 참 믿음과의 관계를 설명해 볼 수 있습니까?

읍내와 시골 사람들은 귀신들렸던 자의 처참한 모습과 그에게 일어난 사건, 그리고 돼지떼의 죽음을 직접 본 자들의 상세한 보고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참으로 누구이신 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이 사는 지역을 떠나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적을 보는 것도 이적에 대해서 듣는 것도 참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적]은 신앙을 갖게 할 수 있는 수단일 뿐이지, 그것이 반드시 참 신앙의 증표하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질문9) 예수께서 이제 귀신들렸던 자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마감하시고 배에 오르십니다. 그 때에 귀신 들렸던 자가 예수께 와서 함께 있기를 간구합니다. 그 때에 귀신 들렸던 자와 예수 사이에 오고 간 대화내용을 말씀해 보십시오(19절).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됨을 뜻합니다(3:14). 귀신들렸던 자가 예수와 함께 있기를 구하는 태도는 읍내와 시골 사람들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아마도 그는 이제 참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를 고쳐주신 예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압도되어서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자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적을 체험하고 그의 제자가 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제자로 부르고, 또한 일할 곳을 배치하는 권리도 전적으로 예수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직접 예수를 따르고 그분 곁에서 그를 보필하고 함께 선교할 제자들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은 귀신들렸던 자처럼 특별히 자신이 거하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 곁에서 따르는 제자들만이 진정한 제자가 아니라, 좀더 넓은 의미로 도처에서 자신이 잘 아는 친족들과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 역시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질문10) 20절은 이 사건 전체의 결말이자, 평가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의 동기가 되었던 귀신들렸던 자는 이제 어떠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께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의 병을 치유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큰 일"이 귀신들렸던 자의 집뿐만 아니라, 거라사 지방, 더 나아가 10개의 도시들로 이뤄진 광대한 지역에 전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데가볼리"는 "10개의 도시"라는 뜻으로 다메섹, 라파나, 디온, 카나다, 시도폴리스, 가다라, 힙포스, 펠라, 거라사, 필라델피아를 가리킵니다. 이 지방은 요단 강 동편으로 알렉산더 대왕이 헬라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세운 헬라 도시들이었습니다. 이런 도시들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방 선교가 예수 시대에 벌써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예수의 사역이 거라사 지방을 뛰어 넘어 "데가볼리"까지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행하신 능력의 결과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마가복음 저자의 의도입니다.
예수께서는 19절에서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라"고 명령하셨고, 귀신들렸던 자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전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이적의 근원을 "주", 곧 하나님께 돌리고 계시지만, 마가복음 저자가 등장시킴 귀신들렸던 자는 예수의 능력 속에 계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예수와 초대 교회 사이의 삶의 자리의 차이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볼 때 "예수 안에 아주 특별하게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이 사람의 고백을 예수에 대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것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거라사 광인의 모습과 현대인, 구체적으로 나와 닮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찮은 금연도 기도가 필요하답니다.

♣ 만일 당신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체험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응답하겠습니까?

♣ 당신은 이 이적 이야기를 통하여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지를 말씀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