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익수 교수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인자이신 예수의 권세(2:1-12)

본문읽기

1 며칠이 지나서,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다. 예수가 집에 계신다는 말이 퍼지니, 2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마침내 문 앞에 조차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 때에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다. 4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예수가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 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다. 6 율법학자 몇이 거기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하였다. 8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 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9 중풍병 환자에게 '제 죄가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12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가 이런 일을 전혀 본적이 없다"하고 말하였다.

본문해석

이전 단락에 이어 2:1-12에서도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1:45에서는 예수께서 한적한 곳, 즉 바깥 외딴 곳에 계신 것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이 단락에서는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수일 후" 즉 며칠이 지난 후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락은 내용적으로 약간의 단절이 발견됩니다. 예수께서 중풍병환자를 고치시는 이적 이야기(2:1-5a + 10b-12)와 서기관들과 논쟁(2:5b-10a)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미 가버나움에서의 이 이적 이야기를 논쟁설화 속에 넣어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2:1-12을 통일된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라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질문1) 예수께서는 언제 다시 가버나움에 돌아오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 머무신 후 며칠이 지나서 다시 가버나움에 돌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것을 보아, 우리는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 선포 활동을 계속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언제나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이미 소개된 내용을 거듭 언급하는데, 이는 앞의 내용과의 연관성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으므로 집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자리에 누운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집은 보통 방이 하나이고 지붕은 평평했습니다. 그 지붕은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나무로 된 상량 위에 덤불 또는 나뭇가지를 깔고, 그 위에 잘라진 짚들을 섞은 진흙 또는 찰흙을 덮고 밟아 다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집 바깥쪽으로 계단이 있어서 쉽게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이 계단을 통해 올라가서 그 집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붕이야 후에 고칠 수 있겠지만, 중풍병자의 병은 예수를 만날 기회를 놓치면 영영 고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환자는 고통 중에도 이들의 판단에 자신을 맡기면서 간절하게 예수께 나아가려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들의 이러한 결단을 위대한 믿음으로 보시고 병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질문3)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은 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씀 대신에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의 이 "믿음"은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을 믿는 중풍병자와 그를 데려와서 지붕에 구멍을 내고 달아 내릴 만큼 대담한 그들의 결단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병을 치유하는 것과 사죄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인간의 모든 질병과 고통의 원인을 그 사람의 죄의 결과로 이해했고, 따라서 병이 낫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결과로서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자신이 죄를 용서하시는 메시야임을 알리기 위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사죄의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질문4)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주신 사죄의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습니까?

서기관들이 예수의 사죄의 말씀을 아주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가르침대로 사죄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의 특권이요, 고유권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예수의 사죄선언은 참으로 기가 막히고 의아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러한 신성모독죄는 온 회중이 돌로 쳐죽이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박하지 못한 것은 이미 그들이 예수의 권위에 압도당한 까닭이며,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질문5)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이미 간파하시고 그들에게 공박하시면서 자신을 누구라고 밝히고 있습니까? 자신에게 어떠한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인자는 문자적으로 사람의 아들을 뜻합니다. "인자"란 말은 구약에서 '사람', '선지자', '종말론적인 메시야'를 의미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메시야 시대가 되면 모든 죄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사29:18;35:4-6;53:5이하;렘31:34;36:25-27;미7:18- 19참조). 그래서 예수께서는 병을 치유하시는 것과 동시에 죄를 용서하시는 사죄의 선포를 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을 공포하신 것입니다.

질문6)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이시면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알리신 후,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중풍병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거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예수의 말씀대로 중풍병자는 '중풍병과 죄'에서 벗어나 그의 누워 있었던 상을 들고 거기에 운집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집을 향해 걸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께서 죄 용서함의 권세가 있는지를 의심했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치유함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병이 다 나았음을 구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보여줌으로 예수님의 사죄권을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당신은 예수께서 무엇을 전하고자 하셨는지 깨달았습니까? 무엇입니까?
♣ 당신도 고치실만한 결단의 믿음이 있습니까?
♣ 당신을 통해 예수의 사죄의 능력이 전해지는 믿음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2:13-17)

본문읽기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셨다. 무리가 모두 예수께로 나아오니,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15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따라왔던 것이다. 16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17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본문해석

이 단락에는 두 가지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3-14절에서는 예수께서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고, 15-17절에서는 예수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두 이야기가 각각의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마가복음 저자가 의도한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함께 편집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비로소 본문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질문7) 13-14절을 마태 9:9과 누가 5:27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마가복음에서는 1:16-20에서 4명의 제자들을 부르신 것을 상기하면서 "다시" '예수께서 바닷가로 나가셨다'는 표현을 언급하고 있으나,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이 표현을 삭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다고 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마태라는 세리로 소개되고 있는 반면에, 마가복음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레위"는 본명이고, "마태"는 사도가 된 이후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질문8) 2:13-14과 1:16-20은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신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유사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먼저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을 가르치신 후에 제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배경이 되는 곳은 공통적으로 "바닷가, 곧 해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행동묘사가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나가시다가 …하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응답 역시 "즉시 일어나 예수를 쫓다"로 거의 일치합니다.

질문9) 15절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집'에 앉아 제자들은 물론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당시 이방인으로까지 간주되었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무슨 문제를 제기했습니까?

당시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 출신과 非바리새파 출신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 출신의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과 조상들의 유전에 열성적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자신들의 그 보수성과 엄격성 때문에 예수와 그를 따르는 공동체에 대해서 가장 극렬한 적대자가 된 것은 참으로 역설성과 비극적인 일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역설성과 비극적인 일이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사람들에게서 똑같이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질문10) 예수가 당시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던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제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당신은 왜 세리들이 죄인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국가는 세금청부업자들에게 일년 동안 징수해야 할 일정한 세금액을 할당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청부업자들은 계약된 세금액을 국가에 내야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거둔 세금액이 계약된 액수보다 초과되어 거두어졌을 때 나머지 여분은 그들이 가질 수 있었고, 반대로 모자랄 경우는 그들이 스스로 보충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수하에 있는 말단 세리들에게 철저히 징세한 것을 독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개인에게 부과되는 세금율이 일정하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다하게 책정되거나 부정하게 징수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탐욕스런 세리들은 세액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자기 맘대로 세금을 거두어 들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대체로 세리들 모두를 탐욕스런 사람들로 간주하게 되었고, 그들을 기피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질문11) 왜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제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2:1-12에서 이미 예수의 권위에 압도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 제자들에게 그의 스승인 예수께서 율법의 규례를 무시하는 것을 일깨워 줌으로써 스승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과 존경심이 손상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질문12)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들으신 예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의인(義人)"으로, 세리와 죄인들을 "죄인(罪人)"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간파하시고 그들의 표현을 빌어 대답하셨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아무도 의로워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올바른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고, 결국은 구원의 대열에 끼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 당신은 자신이 의인이요, 건강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죄인이요, 병든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 만일 당신이 바로 죄인이요, 병든 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리고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부르러 오셨다면, 당신은 예수께 어떻게 응답하며 살겠습니까?

금식문제(2:18-22)

본문읽기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을 자기들 곁에 두고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신앙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댄 조각이 낡은 데를 당겨서, 더욱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가죽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도 가죽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

본문해석

이 단락 자체를 살펴보면 18-20절은 금식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21-22절은 그것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습니다. 앞의 본문에서는 신랑과 함께 있는 상황하에서 금식과 슬픔은 용납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는데 반해서, 뒤의 본문에서는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 비유로 옛 질서와 새 지리서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내용 결합을 통해서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로 상징되는 유대교의 옛 형식인 "금식"과 생베, 곧 금식과 새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밝힘으로써 예수의 말씀에 근거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유대교의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근거해서 일년에 한번, 속죄일에 의무적으로 금식을 해야만 했습니다(레16:1-34;23:26-32;민29:7,9-11;사 58:5). 그들은 바로 이 날에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금식하는 동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속죄, 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금식은 본래 죄지은 자의 비탄과 회개, 경건과 자기 헌신의 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 중에는 금식의 의미보다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지극히 의식적인 관례로 지켰고, 종국에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예수의 복음에 근거한 우리의 태도나 교회생활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식인 문제(2:23-28)

본문읽기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본문해석

마가복음 저자는 계속해서 예수의 복음과 옛 종교인 유대교와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죄권을 부인하고, 예수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식탁친교를 비난했으며,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었습니다. 마가복음서 저자는 이 단락에서 "안식일문제"에 대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대화를 소개함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그들 사이의 현격한 다른 이해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규례집인 미쉬나에 의하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은 39가지였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윗의 고사를 인용하여 인간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안식일의 규례가 적용되지 않을 수 있음을 바리새인에게 반증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와 같이 자유로운 행동을 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안식일의 규례를 초월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주신이신 예수께서는 안식일에도 인간에게 사랑과 자유를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늘과 땅과 모든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예수는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완전하게 계시하는 분이시며, 그의 공동체를 위해 율법의 의문화(疑文化)된 조문들을 대신하고 자신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의지의 구현자가 되신 것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 당신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