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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로교회는 저가 멕시코에서 처음 설립한 원주민 교회 입니다.
저가 40대 초반 처음 멕시코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출발 할 때는 선교 현지에는 전혀 안내자가 없었습니다. 꼭 어떤 지역을 선택해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막연히 시골에서 원주민 선교만 한다는 결심만 하고 출발 했습니다. 그리고 원주민 선교가 대단히 위험하다는 정보만 입수하고 있었습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자기들 신앙 외에 타 신앙을 전혀 받아드릴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가톨릭이라는 한국의 천주교회와는 또 다른 모습의 천주교회 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원래 토속 신앙을 스페인 정복자들이 가지고 온 가톨릭에 혼합한 다신교적 신앙 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우리나라의 조선 시대 때와 비슷한 봉건사상으로 타 신앙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만약 선교를 하면 꼭 보복을 하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보복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알려진 방법은 청년들이 밤에 몰래 와서 죽이고 묻어버리는 수법이었습니다.
멕시코 시골에는 치안이 전혀 미치지 않는 지역 이었습니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미국선교사가 멕시코에서 행방불명 된 선교사는 약 5만 이상이 되었습니다. 이들 모두 위에 말한 방법 등으로 순교를 한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아니 했습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처음에는 구제 사업만 하다가 떠날 때 그들에게 필요한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갔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멕시코시티 쪽으로 접근 해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전도하여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빈틈을 찾아보려고 무척 노력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정착지가 없는 유랑 전도는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꼭 원주민들과 같은 수준에서 먹고 입고 자며 생활 한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도심에 나와서 모텔이나 방을 얻어서 생활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항상 그들과 같은 수준에서 나누어 쓰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 했습니다.
그들 원주민들의 생활의 수준은 우리나라 조선 시대 때 가난한 시골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나는 잠은 거의 차에서 잤고, 식사는 빵 몇 조각으로 해결 했습니다 그들은 마구간 같은 방 하나에 열 식구 정도가 먹고 자고 생활하기 때문에 나는 그 속에 끼어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돼지기름 같은 기름 덩어리가 많아서 나는 그것을 먹고 심한 설사에 몇 번 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곤 했지만 그들의 민간요법인 생감자 짠물을 먹고 겨우 진정되곤 했습니다. 한참 설사를 할 때는 창자까지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몇 달 동안을 이렇게 원주민 촌을 순회하는 동안 멕시코시티에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너무 지쳐 있었습니다. 정착지가 없는 곳에서 누구 한 사람 맞아주는 사람 없이 더위와 굶주림이 너무 오래 계속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나는 이들의 미신적 다신교적 신앙의 무지를 해결 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은 한계가 있음을 알고, 이곳 원주민들의 영혼이 불쌍하여 밤마다 눈물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마을을 옮겨 갈 때 마다 오직 내 마음 속에는 저들의 영혼을 구원 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뿐이었습니다 주님은 어디에서나 함께 하셨고 내가 사랑하는 것과 족히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사랑 하셨습니다.
발걸음 마다 총총히 함께 하셨던 주님 감사합니다. 길마다 은혜를 깨닫게 하셨던 주님 감사 합니다 그 가운데 나는 담대함을 배웠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 했습니다 먹고 마실 때 마다 너무도 풍성하고 은혜롭게 채우셨던 주님 부요한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내가 가난해 짐으로 너희를 부요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은혜에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환경이 도래하더라도 모든 것을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제자가 되자고 다짐하면서 험난한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때로는 피곤하고 싫증이 나고 또 불안 했지만 아버지께서 자식들에게 주는 고통이라 생각하고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날이 저물면 잠잘 장소와 배고픔을 채워달라고 기도했고, 어느 때는 정자나무 밑에서, 어느 때는 자동차 안에서 잠자리를 정하고 은하수 흐르는 유성을 헤어가며 밤을 보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늘 할 일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어디를 가든지 승리 하도록 기도 드렸습니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 향긋한 풀 냄새 널따란 들판 모든 것이 조화가 되어 나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했으며,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니" 찬송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계속 전진 했습니다. "주여 이번 발걸음으로 그들이 변화 받게 하소서 실로암으로 보내졌던 한 눈먼 봉사와 같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주님이 하시지 않는 것 이였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순간들 이었습니다.
다음 계속....
저가 40대 초반 처음 멕시코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출발 할 때는 선교 현지에는 전혀 안내자가 없었습니다. 꼭 어떤 지역을 선택해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막연히 시골에서 원주민 선교만 한다는 결심만 하고 출발 했습니다. 그리고 원주민 선교가 대단히 위험하다는 정보만 입수하고 있었습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자기들 신앙 외에 타 신앙을 전혀 받아드릴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가톨릭이라는 한국의 천주교회와는 또 다른 모습의 천주교회 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원래 토속 신앙을 스페인 정복자들이 가지고 온 가톨릭에 혼합한 다신교적 신앙 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우리나라의 조선 시대 때와 비슷한 봉건사상으로 타 신앙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만약 선교를 하면 꼭 보복을 하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보복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알려진 방법은 청년들이 밤에 몰래 와서 죽이고 묻어버리는 수법이었습니다.
멕시코 시골에는 치안이 전혀 미치지 않는 지역 이었습니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미국선교사가 멕시코에서 행방불명 된 선교사는 약 5만 이상이 되었습니다. 이들 모두 위에 말한 방법 등으로 순교를 한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아니 했습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처음에는 구제 사업만 하다가 떠날 때 그들에게 필요한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갔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멕시코시티 쪽으로 접근 해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전도하여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빈틈을 찾아보려고 무척 노력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정착지가 없는 유랑 전도는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꼭 원주민들과 같은 수준에서 먹고 입고 자며 생활 한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도심에 나와서 모텔이나 방을 얻어서 생활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항상 그들과 같은 수준에서 나누어 쓰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 했습니다.
그들 원주민들의 생활의 수준은 우리나라 조선 시대 때 가난한 시골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나는 잠은 거의 차에서 잤고, 식사는 빵 몇 조각으로 해결 했습니다 그들은 마구간 같은 방 하나에 열 식구 정도가 먹고 자고 생활하기 때문에 나는 그 속에 끼어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돼지기름 같은 기름 덩어리가 많아서 나는 그것을 먹고 심한 설사에 몇 번 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곤 했지만 그들의 민간요법인 생감자 짠물을 먹고 겨우 진정되곤 했습니다. 한참 설사를 할 때는 창자까지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몇 달 동안을 이렇게 원주민 촌을 순회하는 동안 멕시코시티에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너무 지쳐 있었습니다. 정착지가 없는 곳에서 누구 한 사람 맞아주는 사람 없이 더위와 굶주림이 너무 오래 계속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나는 이들의 미신적 다신교적 신앙의 무지를 해결 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은 한계가 있음을 알고, 이곳 원주민들의 영혼이 불쌍하여 밤마다 눈물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마을을 옮겨 갈 때 마다 오직 내 마음 속에는 저들의 영혼을 구원 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뿐이었습니다 주님은 어디에서나 함께 하셨고 내가 사랑하는 것과 족히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사랑 하셨습니다.
발걸음 마다 총총히 함께 하셨던 주님 감사합니다. 길마다 은혜를 깨닫게 하셨던 주님 감사 합니다 그 가운데 나는 담대함을 배웠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 했습니다 먹고 마실 때 마다 너무도 풍성하고 은혜롭게 채우셨던 주님 부요한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내가 가난해 짐으로 너희를 부요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은혜에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환경이 도래하더라도 모든 것을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제자가 되자고 다짐하면서 험난한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때로는 피곤하고 싫증이 나고 또 불안 했지만 아버지께서 자식들에게 주는 고통이라 생각하고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날이 저물면 잠잘 장소와 배고픔을 채워달라고 기도했고, 어느 때는 정자나무 밑에서, 어느 때는 자동차 안에서 잠자리를 정하고 은하수 흐르는 유성을 헤어가며 밤을 보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늘 할 일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어디를 가든지 승리 하도록 기도 드렸습니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 향긋한 풀 냄새 널따란 들판 모든 것이 조화가 되어 나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했으며,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니" 찬송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계속 전진 했습니다. "주여 이번 발걸음으로 그들이 변화 받게 하소서 실로암으로 보내졌던 한 눈먼 봉사와 같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주님이 하시지 않는 것 이였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순간들 이었습니다.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