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멕시코 혁명의 공헌과 실패

멕시코 민중들은 지긋지긋한 디아스 독재자의 35년 동안의 장기집권과 무능한 지도자들로 인하여 광활한 멕시코의 국토를 미국에게 몽땅 빼앗긴 실정에 대하여 분노를 품고 있었다. 이러한 민중의 거센 분노와 반발이 결국 ’멕시코 혁명’의 도화선으로 이어졌다.

1910년에 혁명가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과거 독재자들에게 강제로 빼앗겼던 농지를 모두 인디언들에게 되돌려 줄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여덟 차례나 재선하여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일인 독재를 한 정권에 도전하여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투쟁한 것은 오로지 민중들이었다. 이들이 봉기의 선두에 나섰다.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혁명의 기수로서 성공하여 드디어 혁명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3년 후 1913년에 미국이 후원하는 우에르따 장군의 친미 우익 쿠데타로 인하여 마데로 대통령은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 후 우익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우에르따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바람에 민중혁명의 불길은 잠간 동안 멈추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친미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서 반혁명적 탄압과 암살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미국은 멕시코 민중들의 투쟁을 무식하고 천박한 행동이라고 비방하면서 우에르따 군사정권을 노골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1917년에 미국이 지원하는 우에르따의 군사독재정권은 혁명군에 의하여 완전히 타도되고 멕시코 혁명의 불길은 또 다시 타올랐다.

1917년에 카란사-오브레곤 두 사람의 연합으로 형성된 혁명의 주체세력은 우선 외국 자본이 국내 경제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고 과거에 독재정권을 지원한 catholic 교회를 개혁정부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다.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는 개혁도 과감하게 시행했다.

또 혁명에 과감하게 참여한 메소티소(흑인 혼혈)와 인디오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졌으며 흑인과 인디오의 문화가 멕시코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되었다.

멕시코 혁명을 통하여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멕시코는 백인의 국가가 아니다’고 하는 인식의 뿌리를 민중의 마음속에 깊이 내리게 한 것이다.

민중의 인식변화로 인하여 원주민들은 ‘마야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적 불행에 대한 민족적 정체성을 밝히는데도 멕시코의 혁명운동은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에 멕시코의 혁명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혁명운동 내부에 분파와 분열의 문제가 있긴 하였으나 이 문제는 어느 정도 극복이 되었고, 혁명운동의 진행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고 평가 될 수 있다.

카란사-오브래곤 두 혁명가들이 결속된 혁명정권은 1917년부터 1927년까지 10년 동안 수 없이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 부분적 개혁을 진행하면서 혁명정권을 견지해 나아갔다.

1927년에 멕시코에서 뿐만 아니라 중남미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당이라고 평가받는 멕시코의 ‘제도혁명당(pri)’이 새로 창당되었다. 그런데 이 새로 창당된 ‘제도혁명당(pri)’은 집권 여당으로써 1927년부터 2000년까지 장장 73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다.

‘제도혁명당(pri)은 창당 이후 73년 동안 대통령 선거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지방 주지사 선거와 상하원 선거에서도 항상 95% 이상의 득표로 승리해 왔다.

카르테니스 대통령(1934-1940)의 정권하에서 멕시코 노동당총연합회(ctm)가 창설되었고, 전국농민총연합회(cnc)가 창립 되였으며, 멕시코 혁명당((prm) 등 다양한 민중 중심의 사회운동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창립되고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멕시코의 ‘제도혁명당’에게 큰 시련과 난관이 대두되었다. 미국의 영향 하에서 ‘제도혁명당’은 집권당으로써 방향을 잃고 개혁정신은 표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말레만 대통령’과 ‘코르티네스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있었는데 이 두 개의 정권 하에서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좌파 운동’이라는 이유로 모두 다 추방을 당했다.

놀랍게도 멕시코 제도혁명당이 혁명의 전통을 완전히 망각하고 친미반공 정책을 더 중요시하는 우익 노선으로 변질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자본이 대학도시를 건설하고 고속도로와 댐과 거대한 공공투자 등 미국의 수입대체 공업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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