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에 있는 오대양(주)의 공예품 공장 식당 천장에서 오대양 대표 박순자(朴順子)와 가족·종업원 등 신도 32명이 손이 묶이거나 목에 끈이 감긴 채 시체로 발견된 사건을 말한다.

수사 결과 오대양 대표이자 교주인 박순자는 1984년 공예품 제조업체인 오대양을 설립하고, 종말론을 내세우며 사교(邪敎) 교주로 행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박순자는 자신을 따르는 신도와 자녀들을 집단시설에 수용하고, 신도들로부터 17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사채를 빌린 뒤 원금을 갚지 않고 있던 중 돈을 받으러 간 신도의 가족을 집단 폭행하고 잠적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집단 자살의 원인이나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수사가 마무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7월 오대양 종교집단의 신도였던 김도현 등 6명이 경찰에 자수하면서 사건의 의문점들이 얼마간 밝혀졌다.

자수자들의 진술에 따라, 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을 것으로 경찰이 추정하고 있던 오대양 총무 노순호와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 등 3명이 자살사건 전에 이미 계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오대양 직원들에게 살해당한 뒤 암매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사건이 전면 재조사에 들어갔지만, 이 사건이 경찰의 발표대로 집단자살극인가, 아니면 외부인이 개입된 집단 타살극인가에 대한 논의만 무성했을 뿐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부검 의사는 3구의 시체는 자살이 분명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교주 박순자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교살(絞殺)에 의한 질식사가 분명하며,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행해진 집단 타살극이라고 주장하였다.

1987년 8월29일 토요일, 가을을 재촉하는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용인군 남서면 북리 주(주) 오대양 용인공장에서 남녀 시체 32구가 발견되어 전국민을 경악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대양 용인공장의 공장장 이강수는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살해 있었고 오대양의 사장이자 세칭 오대양교의 교주로 알려진 박신자를 비롯하여 31구의 시체는 식당겸 다용도실 천장 바닥에서 목을 맨 채 누워 있거나 2, 3구씩 포개진 시체로 죽어 있었다. 이들을 목맨 것은 바지나 스커트를 가늘고 길게 자른 천이었다.

경찰은 8월29일 오후부터 수원지검의 지휘를 받으며 수사에 들어갔다. 경찰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현장감식. 감식반을 비롯해 강력계 형사들이 사진 촬영을 하면서 지문을 떠 신원을 확인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 결과 32구 시체의 신원이 전부 확인되었다.

치안본부에서 유능한 감식반이 파견되었고 경기도경, 용인경찰서의 베테랑 형사들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었다.

이날은 아침부터 억센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밤이 되자 폭우로 변해 현장 주변을 더욱 음산하게 했다. 마치 세상에 종말이 온 듯한 기분이었다. 매스컴은 취재 경쟁을 벌이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오대양의 베일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세칭 (주)오대양 사장 박신자. 그녀는 당시 48세로 많은 사채를 끌어들여 공장을 설립하고 종말론으로 신도들을 현혹했다.

'세상이 말세가 되었는데 오대양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전세계 오대양은 내가 주관한다' '오대양을 떠나면 죽음의 재앙을 받는다'라고 설파하여 신도들이 자신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게 만들었다.

박신자는 오대양의 신도들을 집단으로 합숙생활을 하게 했으며 배신자는 가혹하게 린치를 가하는 등 강력한 카리스마로 신도들 위에 군림했다. 박신자는 많은 사채를 끌어들이고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지 않아 물의를 일으켰다.

1987년 8월16일 주유소를 경영하는 이상열(가명)이 박신자에게 빌려준 5억원을 받으러 갔다가 오대양 직원들에 11시간 동안이나 감금을 당하면서 돈을 포기하라는 각서를 강요당한 뒤에 풀어준 사건이 발생했다.

이상열은 즉시 경찰에 신고하여 이상열을 폭행한 오대양 직원 13명을 구속했고 박신자를 참고인 자격으로 불렀으나 조사를 받는 도중 실신을 하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오대양에서 근무하는 직원과 학생, 유아원생 등 1백여명도 종적을 감추었다.

이때 박신자가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박신자에게 돈을 꾸어주었다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 채권자가 수십 명에 이르렀고 채권액도 80억원을 넘게 되었다. 이상열의 단순 폭행사건에서 거액 사기사건으로 발전한 것이다. 경찰은 박신자의 행방을 집중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8월28일 한 채권자가 오대양 용인공장에 잠적되었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제보를 했다. 충남 경찰은 오대양 공장을 기습하여 어린이 19명 등 49명을 발견하고 대전으로 데리고 왔으나 천장에 숨어 있던 박신자 등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여기에 있다. 오대양 공장을 기습한 경찰이 천장에 있었던 것으로 경찰이 추정한 박신자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박신자를 비롯한 31구의 시체가 외부에서 옮겨졌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오대양사건을 집단자살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사실상 명백한 살인사건이었다.

경찰의 추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교주인 박신자는 집단 도피가 한계에 이르렀고 자살을 하자고 충동을 한 뒤에 먼저 자살을 하고 나머지 신도들이 뒤따라 자살을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31구의 시신이 전혀 반항한 흔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도 맞지 않는다.

천장에서 발견된 31구의 시신은 대부분 손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자의로 죽음에 동의했다고 볼 수도 없었다. 참고로 양손이 묶여 있는 시신이 5구, 양손과 양다리가 묶여 있던 시신이 3구, 양다리만 묶여 있던 시신이 여러 구였다.

치안본부 감식반은 박신자가 죽은 뒤에 박신자의 두 아들(24세, 22세)이 차례로 이들을 살해하고 자신들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보았다. 그들의 목을 맨 상처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대들보에 목을 매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대양의 공장장 이강수는 이들의 시체를 천장으로 옮긴 뒤에 자신은 대들보에 목을 맨 것으로 추정했다.물론 이강수도 31명의 사람들 중 상당한 숫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오대양 사건은 미스터리다. 어쩌면 건국이래 가장 큰 미스터리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31명의 추종자들이 사장, 또는 교주의 지시로 자살, 또는 자살에 동의했다는 것은 한국판 '인민사원'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막대한 자금의 행방, 권력층과의 연계설이 나돌았고 두 아들이 박신자를 따라다니고 있었으나 충남도청에서 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남편이 무관하다는 경찰의 발표를 국민들은 믿지 않았다.

채권자들의 빚 독촉과 경찰의 추적이 동기라고 볼 수도 있으나 석연치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대양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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